대전충남인권연대는 대전NGO지원센터와 함께 대전시민이 참여하는 역사탐방을 진행했어요.
다녀온 곳은 경남 거창의 양민학살사건 현장이었는데요, 해설해 주시는 길잡이를 따라 걷는 길은 피난길인 줄 알고 매서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종종걸음으로 따라갔을 주민들이 밟은 길이었습니다. 거창사건의 현장을 글과 사진으로 따라와 보시죠~
2시간 정도가 걸려 도착한 거창에서 가장 먼저, 길잡이를 해 주실 신용균 선생님을 만났어요. 신용균 선생님은 거창에서 나고 자라셨는데 대학을 서울로 가셨다고 해요. 거창에 살 때는 거창사건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정작 서울에서 거창사건을 알게 되셨고, 그 뒤로 고향인 거창의 가슴아픈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데 힘써오셨다고 해요. 거창에 있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셨던 교사이셨고, 지금은 '함께하는 거창'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
거창양민학살 사건의 전말...
거창사건은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사흘 동안 공비 토벌작전을 벌이던 국군 11사단(최덕신 사단장) 9연대 3대대가 공비 토벌을 명분으로 견벽청야 작전을 본따 죄 없는 민간인 719명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예요. 한국전쟁 중 일어난 민간인 학살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법부 판결을 이끌어 낸 대표적인 사건인데요~ 산청과 함양에서 시작되어 거창에서 끝난 사건으로 ‘산청·함양·거창 사건이라고도 부릅니다.

사진_다함께 모인 참가자들과 길잡이를 해주신 신용균 선생님과의 첫만남(김정미@)
경남도립거창대학에서부터 시작된 해설은 '청연마을', '탄량골', '박산골'을 거쳐 '거창사건 역사교육관'에서 마쳤습니다. 1951년 2월 9일 청연마을 84명 학살, 2월 10일 탄량골 100명 학살, 2월 12일 박산골 517명이 희생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처참했을 당시의 상황들이 그려졌어요. 우는 아이들, 두려워 벌벌떨었을 부녀자, 마을 노인들... (공비토벌이라는 명분이 무색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은 15세 이하 어린이 359명, 60세 미만 성인 300명, 60세 이상 성인 60명으로 추정됩니다. )
사진_청연마을학살장소 보존비(김정미@)

군인들은 신원초등학교에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3일 동안 먹고 마시며 추악한 짓을 저질렀고, 이후 주민들에게 피난을 가자며 박산골로 이동, 학살을 자행했다고 해요. 피난을 가는 줄 알고 걸어갔을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한겨울에 군인들의 큰 발걸음을 아이와 부녀자, 노인들이 잰걸음으로 쫓아가느라 힘들었겠다고 참가자들과 이야기 하며 참혹한 심정으로 학살 현장에 다다랐습니다.
거창군의 국회의원 신중목에 의해 폭로되어 국내외 언론에 보도되면서 진상규명을 요구하게 되었어요. 1951년 3월에 국회조사단이 거창에 파견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이 조사를 무산시켰어요. 7월에 진상조사 여론이 다시 형성되면서 '양민학살 관련 책임자 처벌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하여 12월 오익경 무기징역, 한동석 징역 10년, 이종대 무죄, 김종원 3년 구형의 판결이 내려졌어요. 하지만 곧 사면되고 오익경과 한동석은 군에 복직했어요.
사건 이후 3년 여 만에 유골을 수습하여 화장했고, 박산에 안장을 할 수 있었어요. 4.19혁명 이후에 위령비를 세우고, 안장하지 못한 유해를 거두었어요.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서 묘소는 파헤쳐지고 위령비문은 땅에 파묻히는 수난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유족과 유족회 간부는 고초를 겪는 등 말하지 못할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사진_거창사건 희생자 묘역, 이름 모를 누군가의 죽음(김정미 @)

사진_박산골 학살 장소에 세운 안내문과 표지석(김정미@)

사진_박산골 학살 장소(김정미@)

사진_1. 남자와 여자, 아이의 합동묘 중 남성의 묘 / 2.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땅에 묻힌 위령비를 당시 쓰러진 모습으로 재연해 둠.(김정미@)

사진_많이 무더웠던 날씨였는데, 간간히 구름이 해를 가려주었고, 나무그늘은 시원했다.(김정미@)

사진_거창사건 역사박물관 입구에서(김정미@)

사진_위령탑 앞에서(대전NGO지원센터 제공@)
거창사건은 정치적 격동 속에서 권력자들에 의해 묻히고, 삭제될 위기를 겪었지만, 지역민들의 목소리와 싸움으로 명예가 회복되고, 기념관 등이 세워질 수 있었어요. 2022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은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대법원이 판결에 따라 하루빨리 특별법이 제정되어 배상과 관련된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해요.
길잡이를 해주신 신용균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나라마다 역사적 과오와 비극은 다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다 달랐습니다. 어떻게 수습하고 해결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앞으로의 시간 동안 거창사건의 해결과 더이상 국가권력이 국가폭력으로 둔갑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제대로된 민주주의가 실현되도록 서로 손잡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먹구름 가득, 어두컴컴해 졌어요. 소나기가 쏟아지기 전에 단체사진 한장 찰칵! 찍고 재빠르게 이동~ 수승대로 향했습니다.
거창의 명소, 수승대에서 휴식도~
거창에 오면 거창의 명소인 수승대는 그냥 지나치는게 아니라고 해요~

사진_관수루와 거북바위 (김정미@)

수승대는 대한민국의 명승 제 53호로 시원한 계곡과 절경이 아름다운 곳이예요. 백제와 신라의 국경에 위치해서 사신들이 오갈 때마다 송별하는 곳이어서 수송대로 불리다가 퇴계 이황이 이곳의 절경을 예찬하며 수승대로 이름을 바꿨다고 합니다.
수승대는 거북모양의 작은 바위가 너무나 멋진 곳이었어요~ 거북바위라고 불리는 이곳은 계곡 한가운데 자리잡아 옛 선비들이 자신의 이름과 풍류가를 바위에 새겨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특히 이황이 수승대라 이름지을 것을 권한 시도 있었어요.
계곡 물속에 발이라도 담그고 싶었는데 비가 올 예정이고 물이 갑자기 불어날지도 모른다고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와서 아쉬운 마음 가득안고 돌아왔습니다.
수승대에서 길잡이 선생님이 모두에게 쏘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잠시 휴식 후 대전으로 돌아왔습니다. 무더운 날씨에도 함께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려요!!!
거창에 함께 다녀오신 중도일보 임병안 기자님의 기사도 함께 공유합니다.
https://dchr.campaignus.me/31/?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29939372&t=board
대전충남인권연대는 대전NGO지원센터와 함께 대전시민이 참여하는 역사탐방을 진행했어요.
다녀온 곳은 경남 거창의 양민학살사건 현장이었는데요, 해설해 주시는 길잡이를 따라 걷는 길은 피난길인 줄 알고 매서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종종걸음으로 따라갔을 주민들이 밟은 길이었습니다. 거창사건의 현장을 글과 사진으로 따라와 보시죠~
2시간 정도가 걸려 도착한 거창에서 가장 먼저, 길잡이를 해 주실 신용균 선생님을 만났어요. 신용균 선생님은 거창에서 나고 자라셨는데 대학을 서울로 가셨다고 해요. 거창에 살 때는 거창사건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정작 서울에서 거창사건을 알게 되셨고, 그 뒤로 고향인 거창의 가슴아픈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데 힘써오셨다고 해요. 거창에 있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셨던 교사이셨고, 지금은 '함께하는 거창'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
거창양민학살 사건의 전말...
거창사건은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사흘 동안 공비 토벌작전을 벌이던 국군 11사단(최덕신 사단장) 9연대 3대대가 공비 토벌을 명분으로 견벽청야 작전을 본따 죄 없는 민간인 719명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예요. 한국전쟁 중 일어난 민간인 학살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법부 판결을 이끌어 낸 대표적인 사건인데요~ 산청과 함양에서 시작되어 거창에서 끝난 사건으로 ‘산청·함양·거창 사건이라고도 부릅니다.
사진_다함께 모인 참가자들과 길잡이를 해주신 신용균 선생님과의 첫만남(김정미@)
경남도립거창대학에서부터 시작된 해설은 '청연마을', '탄량골', '박산골'을 거쳐 '거창사건 역사교육관'에서 마쳤습니다. 1951년 2월 9일 청연마을 84명 학살, 2월 10일 탄량골 100명 학살, 2월 12일 박산골 517명이 희생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처참했을 당시의 상황들이 그려졌어요. 우는 아이들, 두려워 벌벌떨었을 부녀자, 마을 노인들... (공비토벌이라는 명분이 무색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은 15세 이하 어린이 359명, 60세 미만 성인 300명, 60세 이상 성인 60명으로 추정됩니다. )
사진_청연마을학살장소 보존비(김정미@)
군인들은 신원초등학교에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3일 동안 먹고 마시며 추악한 짓을 저질렀고, 이후 주민들에게 피난을 가자며 박산골로 이동, 학살을 자행했다고 해요. 피난을 가는 줄 알고 걸어갔을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한겨울에 군인들의 큰 발걸음을 아이와 부녀자, 노인들이 잰걸음으로 쫓아가느라 힘들었겠다고 참가자들과 이야기 하며 참혹한 심정으로 학살 현장에 다다랐습니다.
거창군의 국회의원 신중목에 의해 폭로되어 국내외 언론에 보도되면서 진상규명을 요구하게 되었어요. 1951년 3월에 국회조사단이 거창에 파견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이 조사를 무산시켰어요. 7월에 진상조사 여론이 다시 형성되면서 '양민학살 관련 책임자 처벌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하여 12월 오익경 무기징역, 한동석 징역 10년, 이종대 무죄, 김종원 3년 구형의 판결이 내려졌어요. 하지만 곧 사면되고 오익경과 한동석은 군에 복직했어요.
사건 이후 3년 여 만에 유골을 수습하여 화장했고, 박산에 안장을 할 수 있었어요. 4.19혁명 이후에 위령비를 세우고, 안장하지 못한 유해를 거두었어요.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서 묘소는 파헤쳐지고 위령비문은 땅에 파묻히는 수난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유족과 유족회 간부는 고초를 겪는 등 말하지 못할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사진_거창사건 희생자 묘역, 이름 모를 누군가의 죽음(김정미 @)
사진_박산골 학살 장소에 세운 안내문과 표지석(김정미@)
사진_박산골 학살 장소(김정미@)
사진_1. 남자와 여자, 아이의 합동묘 중 남성의 묘 / 2.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땅에 묻힌 위령비를 당시 쓰러진 모습으로 재연해 둠.(김정미@)
사진_많이 무더웠던 날씨였는데, 간간히 구름이 해를 가려주었고, 나무그늘은 시원했다.(김정미@)
사진_거창사건 역사박물관 입구에서(김정미@)
사진_위령탑 앞에서(대전NGO지원센터 제공@)
거창사건은 정치적 격동 속에서 권력자들에 의해 묻히고, 삭제될 위기를 겪었지만, 지역민들의 목소리와 싸움으로 명예가 회복되고, 기념관 등이 세워질 수 있었어요. 2022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은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대법원이 판결에 따라 하루빨리 특별법이 제정되어 배상과 관련된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해요.
길잡이를 해주신 신용균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앞으로의 시간 동안 거창사건의 해결과 더이상 국가권력이 국가폭력으로 둔갑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제대로된 민주주의가 실현되도록 서로 손잡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먹구름 가득, 어두컴컴해 졌어요. 소나기가 쏟아지기 전에 단체사진 한장 찰칵! 찍고 재빠르게 이동~ 수승대로 향했습니다.
거창의 명소, 수승대에서 휴식도~
거창에 오면 거창의 명소인 수승대는 그냥 지나치는게 아니라고 해요~
사진_관수루와 거북바위 (김정미@)
수승대는 대한민국의 명승 제 53호로 시원한 계곡과 절경이 아름다운 곳이예요. 백제와 신라의 국경에 위치해서 사신들이 오갈 때마다 송별하는 곳이어서 수송대로 불리다가 퇴계 이황이 이곳의 절경을 예찬하며 수승대로 이름을 바꿨다고 합니다.
수승대는 거북모양의 작은 바위가 너무나 멋진 곳이었어요~ 거북바위라고 불리는 이곳은 계곡 한가운데 자리잡아 옛 선비들이 자신의 이름과 풍류가를 바위에 새겨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특히 이황이 수승대라 이름지을 것을 권한 시도 있었어요.
계곡 물속에 발이라도 담그고 싶었는데 비가 올 예정이고 물이 갑자기 불어날지도 모른다고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와서 아쉬운 마음 가득안고 돌아왔습니다.
수승대에서 길잡이 선생님이 모두에게 쏘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잠시 휴식 후 대전으로 돌아왔습니다. 무더운 날씨에도 함께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려요!!!
거창에 함께 다녀오신 중도일보 임병안 기자님의 기사도 함께 공유합니다.
https://dchr.campaignus.me/31/?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29939372&t=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