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대전 월평공원의 작은 연못에서 올챙이를 관찰하고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부엉이를 보았다. 그때는 오후 6시쯤 아주 늦은 시간도 아닌데 산책로에서 멀리 않은 하천이 내려다보이는 나뭇가지에 부엉이는 앉아 있었다. 까치가 휙휙 날아들어 쪼아대도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있었다. 몇 분을 관찰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부엉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 걱정됐다. 월평공원이라 봐야 깊은 산도 아닌데 부엉이가 짝을 이뤄 새끼를 키워낼 수 있을까? 애써 만든 보금자리에 새끼들이 들고양이에 공격당하는 것은 아닐까? 인근에 들어선 아파트숲에서 빛과 소음이 결국에는 부엉이를 떠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걱정 말이다.
나는 최근에 자동차를 바꾸려 준비하고 있다. 지금 운전하는 승용차는 14년 됐는데 배기가스가 하얗게 나오고 매연 냄새도 부쩍 심해져 더는 사용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디젤자동차를 구매하기로 마음먹은 때부터 환경오염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내가 지구에 초래할 수 있는 오염의 허용치는 어디까지인가'를 고민하게 됐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인권(人權)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기본적 권리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권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다. 춥지 않게 난방을 하거나 배고프지 않게 산과 들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어느새 돼지에게서 신체를 떼어내 사람에게 이식하고, 화석연료가 얼마나 쓰이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우주여행을 선택할 수 있다. 사회가 책정한 가격에 부응하면 자동차를 몇 대나 소유할 수 있으며, 하늘을 나는 새보다 높게 빌딩을 세워 집을 마련할 수도 있다.
지구생태계 시각에서 보면 인권은 피아노 건반의 '솔' 음계에 해당하는지 모른다. '도' 음계에서는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레'에서는 땅의 온기가 느껴지고, 깨끗한 공기가 바람 이는 곳이 '미' 음계일 것이며, 범고래가 플라스틱 쓰레기를 뱃속에 품지 않는 바다환경이 '파' 즈음 될 것이다. 평평하면서 다양한 음계를 가져 화음을 내는 피아노 건반처럼 지구의 시각에서 본다면 여러 건반 중의 하나가 인간의 권리일 것이다. 그렇지만 오염과 쓰레기는 무한하게 만드는 게 우리라는 생각까지 확장돼 요즘 마음이 여간 불편하게 아니다. 나 역시 습관적으로 자동차를 가지려 함으로써 지구에 쇳덩이 쓰레기를 하나 더 만들어냈구나, 이 몸뚱이가 모래가 되어도 저 쇳덩이는 지구의 어딘가에 녹슬고 있을 텐데. 이런 마음이다. 그런데 나는 권한을 스스로 낮추는 행동을 실행하지 못한다.
지난해 4월 대전에서 진행된 특강에서 조효제 교수는 기후위기를 다시 인권의 측면에서 대안을 제시했다. 그때 기록했던 메모를 들춰보니 인권의 끝단에서 최대한의 기후위기를 피해 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가장 아래의 밑단에서는 가뭄과 폭우, 기상이변에 직접 피해를 겪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인간이 초래한 기후위기는 잦은 태풍 등으로 인간의 생명권을 위협하고 삶을 유지하는 건강권과 생계권을 앗아간다고 한다. 된더위가 확대되면서 반대로 겨울스포츠는 사양길에 접어들었으며, 미세먼지가 심할 때는 프로야구가 중단되는 등 이미 스포츠권리는 침해받고 있다고 '탄소 사회의 종말'에서 말하고 있다. 눈여겨 읽은 부분은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로 기후위기가 발생했다는 점을 명백한 사실로 인정한다면, 온실가스 배출은 인권의 존엄을 파괴하는 반인권적 행위를 자행한 것으로, 탄소 배출을 막는 것이 인권증진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 부분이다. 부엉이에서 시작한 고민이 기후위기에 닿았고, 인권 문제로 이어져 결국 나와 이웃을 위해 무엇을 행동할 것인지 오늘도 묻고 있다.
글_임병안(중도일보 기자)
지난 4월 대전 월평공원의 작은 연못에서 올챙이를 관찰하고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부엉이를 보았다. 그때는 오후 6시쯤 아주 늦은 시간도 아닌데 산책로에서 멀리 않은 하천이 내려다보이는 나뭇가지에 부엉이는 앉아 있었다. 까치가 휙휙 날아들어 쪼아대도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있었다. 몇 분을 관찰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부엉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 걱정됐다. 월평공원이라 봐야 깊은 산도 아닌데 부엉이가 짝을 이뤄 새끼를 키워낼 수 있을까? 애써 만든 보금자리에 새끼들이 들고양이에 공격당하는 것은 아닐까? 인근에 들어선 아파트숲에서 빛과 소음이 결국에는 부엉이를 떠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걱정 말이다.
나는 최근에 자동차를 바꾸려 준비하고 있다. 지금 운전하는 승용차는 14년 됐는데 배기가스가 하얗게 나오고 매연 냄새도 부쩍 심해져 더는 사용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디젤자동차를 구매하기로 마음먹은 때부터 환경오염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내가 지구에 초래할 수 있는 오염의 허용치는 어디까지인가'를 고민하게 됐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인권(人權)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기본적 권리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권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다. 춥지 않게 난방을 하거나 배고프지 않게 산과 들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어느새 돼지에게서 신체를 떼어내 사람에게 이식하고, 화석연료가 얼마나 쓰이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우주여행을 선택할 수 있다. 사회가 책정한 가격에 부응하면 자동차를 몇 대나 소유할 수 있으며, 하늘을 나는 새보다 높게 빌딩을 세워 집을 마련할 수도 있다.
지구생태계 시각에서 보면 인권은 피아노 건반의 '솔' 음계에 해당하는지 모른다. '도' 음계에서는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레'에서는 땅의 온기가 느껴지고, 깨끗한 공기가 바람 이는 곳이 '미' 음계일 것이며, 범고래가 플라스틱 쓰레기를 뱃속에 품지 않는 바다환경이 '파' 즈음 될 것이다. 평평하면서 다양한 음계를 가져 화음을 내는 피아노 건반처럼 지구의 시각에서 본다면 여러 건반 중의 하나가 인간의 권리일 것이다. 그렇지만 오염과 쓰레기는 무한하게 만드는 게 우리라는 생각까지 확장돼 요즘 마음이 여간 불편하게 아니다. 나 역시 습관적으로 자동차를 가지려 함으로써 지구에 쇳덩이 쓰레기를 하나 더 만들어냈구나, 이 몸뚱이가 모래가 되어도 저 쇳덩이는 지구의 어딘가에 녹슬고 있을 텐데. 이런 마음이다. 그런데 나는 권한을 스스로 낮추는 행동을 실행하지 못한다.
지난해 4월 대전에서 진행된 특강에서 조효제 교수는 기후위기를 다시 인권의 측면에서 대안을 제시했다. 그때 기록했던 메모를 들춰보니 인권의 끝단에서 최대한의 기후위기를 피해 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가장 아래의 밑단에서는 가뭄과 폭우, 기상이변에 직접 피해를 겪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인간이 초래한 기후위기는 잦은 태풍 등으로 인간의 생명권을 위협하고 삶을 유지하는 건강권과 생계권을 앗아간다고 한다. 된더위가 확대되면서 반대로 겨울스포츠는 사양길에 접어들었으며, 미세먼지가 심할 때는 프로야구가 중단되는 등 이미 스포츠권리는 침해받고 있다고 '탄소 사회의 종말'에서 말하고 있다. 눈여겨 읽은 부분은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로 기후위기가 발생했다는 점을 명백한 사실로 인정한다면, 온실가스 배출은 인권의 존엄을 파괴하는 반인권적 행위를 자행한 것으로, 탄소 배출을 막는 것이 인권증진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 부분이다. 부엉이에서 시작한 고민이 기후위기에 닿았고, 인권 문제로 이어져 결국 나와 이웃을 위해 무엇을 행동할 것인지 오늘도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