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석(사단법인 토닥토닥 이사장), 박은영(대전충남녹색연합 사무처장), 오임술(민주노총 대전본부 노동안전국장), 
이채민(KOICA 해외봉사단 코디네이터), 임병안(중도일보 기자), 안선영(군포중학교 교장)님과 같은 
지역의 현장 활동가들이 생활하면서 느끼는 인권현안에 대해 2주에 한 번씩 기고하는 칼럼입니다.

시로 물드는 교실

관리자
2023-11-29

글_안선영(장곡중학교 교감)


  우리 학교 국어 선생님의 수업이 동네 신문에 실렸다. 선생님도 학생들도 고맙고 예뻐서 신문을 보다 몇 번이나 울컥했다. 누군가를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힘의 기본이 역지사지할 수 있는 능력 아닐까? 학교 수업을 통해 어떻게 인권 감수성을 키워가고 있는지 소개(자랑)하고자 한다.


선생님의 변(수업 소개)

학생들은 시를 어려워합니다. 무슨 내용인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시는 아무 준비 없이 감상해도 괜찮은데 학생들은 시를 감사하며 시적 화자와 정서, 태도, 표현법 등을 분석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감을 많이 느끼는 듯싶습니다. 학생들이 아무 부담 없이 시를 감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시집을 북 트럭에 가득 싣고 교실로 향했습니다. 그저 본인의 마음을 울리는 시를 찾아보라고 하니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다들 부담 없이 시집을 집어 들었습니다. 날이 따뜻할 때는 운동장에서 시집을 읽기도 했습니다. 물론 친구들은 시를 읽기보다는 바깥 풍경을 더 즐겼습니다만 시집을 쥐고 운동장에 앉아 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문학 소년, 소녀들 같아 웃음이 났습니다. 날이 좋지 않을 때는 교실에서 잔잔한 배경 음악을 들으며 시집을 읽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몇몇 친구들은 시를 읽으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 중략 ...

마지막으로 시 처방전 작성하기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시 처방전 작성하기는 친구들이 솔직하게 작성해 준 고민에 어울리는 시를 소개해주고, 친구의 고민에 대한 진심 어린 처방전을 작성해 주는 활동입니다. 이 활동을 하기 위해 먼저 익명으로 모든 학생의 고민을 받았고, 취합된 고민을 다 함께 읽으며 고민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늘 밝고 쾌활하던 친구들이었는데 고민 글 속 친구들은 진중하면서도 울적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각자가 처방전을 작성하고 싶은 고민을 선택하고, 모든 고민이 선택될 수 있도록 골고루 분배하였습니다. ‘여자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어요.’라는 고민에 ‘다시 태어나세요.’라고 처방을 해 주는 것은 부적절하니, 단 한 줄 시라도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진심이 담겨야 하고 상대방도 그걸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작성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처방전은 익명의 친구들에게 전달된다고 안내했습니다. 학생들은 매우 진지하게 친구의 고민을 여러 번 읽었고, 알맞은 시를 선택했습니다. 성심성의껏 처방전을 작성했고, 작성된 처방전은 익명의 친구들에게 잘 전달되었습니다. 친구들의 고민에 따뜻한 시를 처방하고, 시에 담긴 의미와 친구들의 고민을 연결 지어 설명한 학생들의 처방전을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친구의 고민에 다정하게 답해준 친구들의 마음이 참 예쁘기도 했고, ‘이제는 친구들이 시를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흐뭇했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고민>-무뚝뚝한감자칩의 사연

저는 학구열이 강한 대한민국의 K-고3입니다. 예체능이라 공부는 생각 안 해도 되고 안 하고 있어요. 실기로만 가야 하다 보니 실기 실력이 엄청나야 하더라고요. 같은 학원 다니는 친구를 보니 너무나 잘해서 벽을 느낀 기분이었습니다. 선생님도 그 친구를 보며 바로 실기를 보아도 합격일 거 같다고 말씀하시는데 부러우면서도 내가 저런 애들과 같이 실기를 보고 통과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학원에 갈 때마다 선생님은 실력이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옆에서 같이 배우는 친구와 저 자신이 너무 비교되더라고요. 슬럼프가 온 기분이에요. 실력이 느는지도 모르겠고 제 작품을 볼 때마다 유치하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어떻게 해야 슬럼프를 극복하고 실력이 늘 수 있을까요?




<처방 時>


성숙 – 고재종


바람의 따뜻한 혀가

사알짜, 우듬지에 닿기만 해도

강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짜갈짜갈 소리 날 듯

온통 보석 조각으로 반짝이더니


바람의 싸늘한 손이

씽 씨잉. 싸대기를 후리자

강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후둑 후두둑 굵은 눈물 방울로

온통 강물에 쏟아지나니


온몸이 떨리는 황홀과

온몸이 떨리는 매정함 사이

그러나 미루나무는 

그 키 한두 자쯤이나 더 키우고

몸피 두세 치나 더 불린 채

이제는 아무도 무심한 어느 날

저 강 끝으로 정정한 눈빛도 주거니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 들 줄도 알거니


<처방전> - 미루나무인 여러분께

우리는 누구나 지신이 남들보다 뒤처져 있다는 생각, 모두들 어딘가로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제자리에 머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번씩 합니다. 저는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자연스레 생각도 많아지고 대학이라는 커다란 벽에 부딪혀 낙담할 때가 많았습니다. 열아홉, 그 나이만으로도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부담과 스트레스를 짊어지게 되었지요. 저는 누구나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고등학교 3학년의 마지막 중간고사 기간에 결국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어요. 온전히 수업에 집중하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무기력하게 앉아만 있었어요. 마치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것 같았죠. 과거의 나 자신보다 더 열정적이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었어요. 결국 이대로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할까 봐 걱정도 많이 했었어요.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나에게 성숙해질 수 있는 시간을 주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좋아하는 라디오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보냈고, 그 과정에서 내가 미래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가슴 뛰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이 슬럼프의 기간이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지만 또 다른 동기부여이기도 했답니다.

고재종의 <성숙>이라는 시는 고통과 환희의 감정을 통해 성숙해질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이 시의 고통스러운 날은 저와 당신의 슬럼프 기간과도 같죠. 이 시의 미루나무가 바로 저와 당신이에요. 미루나무는 처음에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봄을 느낍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날들에 기대와 열정을 보이죠.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격렬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바람의 싸늘한 손에 의해 미루나무 앞은 후두둑 긁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현실의 매정함에 아파합니다. 우리 삶도 따뜻한 바람과 차가운 바람을 모두 맞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모두 맞고 견디는 것은 우리의 몫이죠. 미루나무는 이 고통에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키는 한두 자쯤 더 크고 몸집도 두세 치나 더 불어났어요. 단단해진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 바로 나 그 자체가 성숙해진 것이에요. 결국 고통의 시간을 겪고 버틴 미루나무는 “짜갈짜갈‘하는 특유의 소리를 내며 보석처럼, 어쩌면 보석보다 더 찬란하게 반짝입니다. 당신도 지금 이 미루나무처럼 성숙해지기 위해 잠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이에요. 그 시간들이 지나가지 않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당신과 비교하게 되는 타인도 힘든 과정을 먼저 겪고 현재는 성숙한 미루나무가 된 것일 거에요. 힘들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믿고, 묵묵히 고통의 시간들을 버텨 보석처럼 반짝이는 당신이 되기를 응원하고 기다리겠습니다.


그 고통을 겪어 본 사람만이, 그 시절을 함께 관통하고 있는 사람만이 해 줄 수 있는 처방전이라 더 공감이 되고 힘이 되었을 것이다. 매일 매일 좀 더 좋은 수업을 고민하는 선생님과 그 선생님의 노력에 맞장구를 쳐주는 우리 학생들에게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