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임병안(중도일보 기자)

책 표지_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강지은 저
'가난과 빈곤' 요즘 이 두 표현에 나의 내면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곰곰이 살피는 중입니다. 무척 낯설고, 평소에 사용하지 않아 생경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내면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다시 반문합니다. 가난하고 빈곤한 것을 나는 왜 낯설고 생경하게 느끼는 것일까? 가난과 빈곤이 드물거나 부도덕한 것도 아닌데, 넉넉하고 풍요로우면서 부유한 모습만 바라보고 그에 대해서만 주목하고 있었던 것일까? 저를 비롯해 주변에서 빈곤과 가난을 찾는 일에 무게를 더 두어 균형을 맞춰야 하는 게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몇 가지 최근 경험에서 시작됐습니다. 먼저, 저희 신문에 6주 간격으로 글을 보내주시는 한 필진에게 원고에 담긴 문장을 재검토 해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원고를 신문에 게재하기 전에 미리 받아 읽던 중 해외에 어느 명사의 말을 빌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너의 잘못이다'라는 문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느냐보다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의미를 강조하는 중에 담긴 표현으로 짐작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테이프를 뒤로 돌려 다시 읽어봐도 목구멍으로 삼킬 수 없는 표현 같아 "독자들께서 오해할 수 있는 표현같습니다"라고 점잖게 수정을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다행히 필진께서도 공감하셔서 해당 문장은 삭제되어 수정된 글이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가난에 대해 이렇게 인식하는 시선이 혹시 보편적인 것일까 생각을 되새김질하고 있습니다.
또 제가 주로 법원에서 일거리를 찾다보니 법정 방청석에 앉아 재판을 지켜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날은 앞서 강도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수감된 와중에, 같은 방 수형인을 또다시 살인한 혐의로 기소된 20대 피고에 대해 선고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뉴스가 여러 차례 보도되어 어떤 사건인지 아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대중의 관심은 교정시설에서 살인을 저지른 무기수에게 법원은 사형을 선고할 것인가에 쏠렸지만, 저는 교정시설 관리감독 부재 문제가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항소심 법원에서도 피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판결문에서도 피고의 잔혹한 심성보다는 코로나19로 인해 극도로 제한된 수형환경 등의 환경요인에 무게를 두어 판단하였습니다. 판사는 중학교 생활기록부부터 시작해 피고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공식적인 문서는 모두 열람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중학교 생활기록부에 피고의 성격을 설명한 선생님의 기록 등을 판결문에 적시했으니까요. 판사가 바라본 피고의 삶 속에서도 '경제적 어려움'과 '부모로부터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환경', '가족과의 유대관계 단절', '직장생활에서 3000~4000만원 적금과 스포츠 토토 탕진' 등이 판결문에 기록되었습니다. 판사가 양형을 위해 20대 피고의 삶을 꼼꼼히 살펴보았구나 안도할 수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판사의 노력이 허무하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겪는 빈곤과 가난에 대해 조금 일찍 관심을 기울이는 이가 있었다면, 판사가 그의 삶을 돌아보는 노력보다 훨씬 값진 일이었지 않았을까 생각에서 말이죠.
지난달에는 계룡문고를 지나다가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라는 책을 집어 들었는데 마침 몇 주 뒤에 책의 저자 강지나 작가의 북콘서트까지 참여했습니다. 가난에 대해 규범적으로 또는 경제학적으로 아니면 논리적으로 설명한 책이 아니어서 더 맘에 들었습니다. 책 제목처럼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가난한 청소년이 성인이 되어 자립하는 과정을 인터뷰를 통해 쫓아가는 일기장 같은 글입니다. 책에 등장하는 가난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지금은 성인이 된 이들이 제가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제 주변에 분명 있을 것이고 마주하지 못한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꼼꼼히 읽게 되었습니다. 강지나 작가의 북콘서트에서는 '빈곤은 구조화되었다'라는 말이 제게 강조되어 다가왔습니다. 또 빈곤은 교묘하게 감춰져 전보다 쉽게 발견할 수 없으며, 빈곤 혐오현상이라는 논제에 대해서도 새롭게 받아들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지나 작가는 부유하거나 빈곤하든 교류가 원활하게 이뤄지는 사회, 고용과 부동산에서 불평등을 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저도 공감했습니다.
제가 업무 중에 독자들께 보여드리는 기사 중에 가난과 빈곤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있었을까요. 앞으로 한동안 이 주제에 대해 생각 되새김질을 반복할 것 같습니다.
글_임병안(중도일보 기자)
책 표지_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강지은 저
'가난과 빈곤' 요즘 이 두 표현에 나의 내면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곰곰이 살피는 중입니다. 무척 낯설고, 평소에 사용하지 않아 생경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내면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다시 반문합니다. 가난하고 빈곤한 것을 나는 왜 낯설고 생경하게 느끼는 것일까? 가난과 빈곤이 드물거나 부도덕한 것도 아닌데, 넉넉하고 풍요로우면서 부유한 모습만 바라보고 그에 대해서만 주목하고 있었던 것일까? 저를 비롯해 주변에서 빈곤과 가난을 찾는 일에 무게를 더 두어 균형을 맞춰야 하는 게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몇 가지 최근 경험에서 시작됐습니다. 먼저, 저희 신문에 6주 간격으로 글을 보내주시는 한 필진에게 원고에 담긴 문장을 재검토 해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원고를 신문에 게재하기 전에 미리 받아 읽던 중 해외에 어느 명사의 말을 빌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너의 잘못이다'라는 문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느냐보다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의미를 강조하는 중에 담긴 표현으로 짐작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테이프를 뒤로 돌려 다시 읽어봐도 목구멍으로 삼킬 수 없는 표현 같아 "독자들께서 오해할 수 있는 표현같습니다"라고 점잖게 수정을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다행히 필진께서도 공감하셔서 해당 문장은 삭제되어 수정된 글이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가난에 대해 이렇게 인식하는 시선이 혹시 보편적인 것일까 생각을 되새김질하고 있습니다.
또 제가 주로 법원에서 일거리를 찾다보니 법정 방청석에 앉아 재판을 지켜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날은 앞서 강도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수감된 와중에, 같은 방 수형인을 또다시 살인한 혐의로 기소된 20대 피고에 대해 선고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뉴스가 여러 차례 보도되어 어떤 사건인지 아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대중의 관심은 교정시설에서 살인을 저지른 무기수에게 법원은 사형을 선고할 것인가에 쏠렸지만, 저는 교정시설 관리감독 부재 문제가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항소심 법원에서도 피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판결문에서도 피고의 잔혹한 심성보다는 코로나19로 인해 극도로 제한된 수형환경 등의 환경요인에 무게를 두어 판단하였습니다. 판사는 중학교 생활기록부부터 시작해 피고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공식적인 문서는 모두 열람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중학교 생활기록부에 피고의 성격을 설명한 선생님의 기록 등을 판결문에 적시했으니까요. 판사가 바라본 피고의 삶 속에서도 '경제적 어려움'과 '부모로부터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환경', '가족과의 유대관계 단절', '직장생활에서 3000~4000만원 적금과 스포츠 토토 탕진' 등이 판결문에 기록되었습니다. 판사가 양형을 위해 20대 피고의 삶을 꼼꼼히 살펴보았구나 안도할 수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판사의 노력이 허무하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겪는 빈곤과 가난에 대해 조금 일찍 관심을 기울이는 이가 있었다면, 판사가 그의 삶을 돌아보는 노력보다 훨씬 값진 일이었지 않았을까 생각에서 말이죠.
지난달에는 계룡문고를 지나다가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라는 책을 집어 들었는데 마침 몇 주 뒤에 책의 저자 강지나 작가의 북콘서트까지 참여했습니다. 가난에 대해 규범적으로 또는 경제학적으로 아니면 논리적으로 설명한 책이 아니어서 더 맘에 들었습니다. 책 제목처럼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가난한 청소년이 성인이 되어 자립하는 과정을 인터뷰를 통해 쫓아가는 일기장 같은 글입니다. 책에 등장하는 가난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지금은 성인이 된 이들이 제가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제 주변에 분명 있을 것이고 마주하지 못한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꼼꼼히 읽게 되었습니다. 강지나 작가의 북콘서트에서는 '빈곤은 구조화되었다'라는 말이 제게 강조되어 다가왔습니다. 또 빈곤은 교묘하게 감춰져 전보다 쉽게 발견할 수 없으며, 빈곤 혐오현상이라는 논제에 대해서도 새롭게 받아들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지나 작가는 부유하거나 빈곤하든 교류가 원활하게 이뤄지는 사회, 고용과 부동산에서 불평등을 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저도 공감했습니다.
제가 업무 중에 독자들께 보여드리는 기사 중에 가난과 빈곤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있었을까요. 앞으로 한동안 이 주제에 대해 생각 되새김질을 반복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