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석(사단법인 토닥토닥 이사장), 박은영(대전충남녹색연합 사무처장), 오임술(민주노총 대전본부 노동안전국장), 
이채민(KOICA 해외봉사단 코디네이터), 임병안(중도일보 기자), 안선영(군포중학교 교장)님과 같은 
지역의 현장 활동가들이 생활하면서 느끼는 인권현안에 대해 2주에 한 번씩 기고하는 칼럼입니다.

돌봄 뫼비우스

관리자
2024-10-09

글_이채민 (여성정책 일을 하다가 가족과 함께 태국으로 떠나 

한국국제협력단 봉사단 코디네이터를 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있다.)  

 

    태국에서 귀국 후, 가장 시급한 일은 나도 남편도 아닌 아이의 일이었다. 어찌저찌 꼬맹이의 유치원은 해결되었지만, 누군가는 어린이집 방학 때 붙어 있어야 했고(물론 긴급 돌봄을 사용했지만, 방학 때 아이 혼자 보낸다는 것이 편치만은 않았다), 일상적 등·하원 시간 엄수는 도전과제였다. 특히 시간을 맞춘다는 것이 내겐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태국에서는 집안일과 아이를 돌봐주는 담당 내니(보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를 챙기고, 부재 시 전적으로 아이를 돌보았다. 집안을 치우고 정리하며 요리했다. 그 뿐인가. 미얀마인이었지만 태국어도 할 수 있어 각종 문제에 통역도 도맡았다. 그 덕분에 남편과 나는 마음 놓고 일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고용주였지만 그는 때로 아이에게 엄마였고, 우리 가족에겐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다. 그렇다. 그는 나의 ‘아내'였다. 그리고 한국에 나의 ‘아내'는 없었다. 대가를 지불했다고 하지만, 얼마만큼이 과연 그녀의 노고에 합당한 지는 지금도 고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진 일 외의 일이 있으면 그때그때 시급에 해당하는 추가 비용을 주는 것 뿐이었다(이마저도 나의 자유다). 나는 그녀 없는 태국 생활을 상상할 수 없다.


 한편, 한국에서 등·하원 시간에 아이와 엄마들을 보니 대개 이 일은 모두 엄마의 몫이었다. 한 엄마가 웃으며 오늘부터 일을 구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여름철 냉면집 식당 서빙이었는데, 일을 시작하게 됐다며 좋아했다. 그녀는 결혼 전 마케팅 담당자였다. 다른 엄마는 아이가 둘 있었는데, 어렵게 구한 일도 코로나로 아이들이 모두 집에 있게 되자 그만두었다고 한다. 매일 우울증 약으로 버티고 있었다. 아이를 할머니가 돌보는 집도 있었는데, 할머니는 내가 왜 이걸 맡아 하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며 손사래를 친다. 자식에 이어 손녀, 어머니(할머니의 어머님은 아직 살아 계셨다) 돌봄까지 맡아야 했던 할머니는 당신 어머님의 건강과 딸의 경력 단절을 우려하며 어쩔 수 없다며 긴 한숨 끝 기꺼이 한 시간 거리인 곳을 달려와 손녀를 케어했다. 이 뫼비우스 같은 돌봄의 굴레에 전 세계 여성들이 속해있다. 중산층 이상 여성의 돌봄 노동은 종종 다른 계층이나 국적의 여성에게 위임된다. 이는 '세계화의 하인들'이라는 개념을 실체화한다.


출처_경향신문(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이주 가사 돌봄 노동자 시범사업 저지 공동행동 발족 기자회견이 지난해 9월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외국인가사근로자 도입 시범사업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국제노동기구(ILO)의 돌봄 노동에 대한 선언은 늦은 감이 있지만 고무적이다. 이 선언은 지난 돌봄 노동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공식 노동’에서 ‘공식 노동’으로 끌어내고, 돌봄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 돌봄 일자리를 ‘양질의 일자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채택됐다. 이주 가사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나오는 한국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2024년과 25년 의장국은 한국이다)


  구체적으로 이 보고서는 ILO가 돌봄 경제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촉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보고서는 기본 원칙에서 "모든 돌봄 노동자는 양질의 일자리를 누려야 한다"며 "모든 회원국은 돌봄 노동자와 관련해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인정, 강제 노동과 아동 노동의 폐지, 고용 및 직업에 대한 차별 철폐, 안전하고 건강한 근무 환경 등 기본 원칙과 권리를 존중하고 증진하며 실현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돌봄 경제에 대한 투자가 사회적으로 양질의 돌봄을 끌어낼 것"이라고 했다. 돌봄 노동자의 권리와 처우가 개선돼야 돌봄 서비스의 질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ILO 선언이 있다고 해서 당장 바뀌는 것은 없다. 문제는 지금까지 돌봄 노동을 공짜 노동으로 인식하고 엄마와 아내 뒤 감춰진 '사랑'이라는 이름의 '노동 착취'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Chatgpt 와 인공지능이 인간을 뛰어넘었고, 더 이상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 속에 돌봄의 가치가 제 자리를 찾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보루가 아닐까. 



*참고 : 세계화의 하인들 - 여성, 이주, 가사노동(2009),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국제노동기구(ILO, 2024), https://www.ilo.org/resource/record-decisions/resolution-concerning-decent-work-and-care-econo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