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고려대 명예교수), 심규상(오마이뉴스 기자), 양해림(충남대 교수), 장원순(공주교대 교수), 좌세준(변호사)님이 돌아가며 

2주에 한 번씩 인권현안에 대해 기고를 하는 전문가 칼럼입니다.

피로 물든 승리, 놀란의 <오딧세이>가 묻는 가해의 무게 역사의 흉터와 궤변의 시대, <오딧세이>가 울리는 묵직한 경고

관리자
2026-08-19

글_심규상(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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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고전 서사시 <오딧세이아>를 스크린으로 불러냈다. 영화는 찬란한 영웅담 대신 보복과 정복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된 참혹한 폭력을 직시하며, 그 끝에 남겨진 절망과 죄책감, 그리고 시대를 가로지르는 뼈아픈 반성과 속죄를 핵심 주제의식으로 끌어올린다.  


<약탈과 살상의 끝... 죄책감과 절망>


이야기는 트로이를 무너뜨린 직후, 잿더미가 된 도시 위에서 시작된다. 정복자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승리의 영광이 아닌, 무자비한 약탈과 방화, 끔찍한 살인과 강간, 그리고 한 문명을 짓밟은 집단학살의 잔재뿐이다. 놀란 감독은 참혹한 폭력의 현장을 서늘하게 포착하며, 정복의 오만이 어떻게 깊은 죄책감과 절망으로 변해가는지를 정밀하게 조명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아득한 여정에서 오디세우스와 선원들이 맞닥뜨리는 기이한 시련들은 전쟁의 광기가 낳은 업보이자 심리적 흉터다. 무참히 스러져간 이들의 비명과 불타오른 도시의 잔상은 환영처럼 그들을 짓누르며, 귀향길은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맞닥뜨리는 절망의 터널로 변모한다.  


<"시키니까 했다"는 항변을 넘어… 골령골의 비극과 평생의 속죄>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정복자의 죄책감과 속죄는 먼 신화 속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는다. 1950년 대전 골령골 학살 현장에서 경찰 측 집행책임자 중 한 명이었던 변홍명 씨(가명)의 삶이 오버랩된다. 그는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했다"면서도 그 날의 참상을 고백하며 평생 충남 금산 진산면의 외딴 골짜기 암자에 머물며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고 속죄하는 삶을 살았다.  

영화 속 오디세우스 역시 명령과 전쟁이라는 거대한 명분 뒤에 숨었던 가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극적 인물로 그려진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환호와 전리품은 약탈과 학살, 강간으로 이어지는 현장 앞에서 무력해지고, 남은 삶 전체를 누르는 죄책감과 평생에 걸친 속죄만이 가해자에게 남겨진 유일한 도덕적 의무가 된다.  


<망각과 궤변으로 일관하는 현실… 영화가 던지는 송곳 같은 경종>


변명과 궤변으로 일관했던 대다수 친일 문인들(서정주, 이광수, 최남선, 노천명, 김동인, 모윤숙, 이인직 등)과 달리, 1948년 자전적 소설 <민족의 죄인>을 통해 자신이 일제의 '혀 노릇'을 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참회했던 소설가 채만식 역시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와 깊게 닿아 있다. 최근 밴드 '양반들'의 전범선 씨는 자신의 외가 5대조 할아버지가 한국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 작가이자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이인직(1862~1916)임을 고백했다. 그는 "부끄러움 때문에 가리고 숨겨 뒀던 역사를 수면 위로 올려 공과를 있는 그대로 돌이켜보고자 했다"라고 밝혔다. 비겁함과 과오를 핑계 뒤에 숨기지 않고 수면 위로 올려 직시할 때 비로소 개인은 물론 역사적 상처의 치유가 시작된다.  


놀란의 <오딧세이>가 그려내는 고통스러운 성찰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차가운 현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대전 골령골 집단학살은 물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무자비한 발포 주동자들과 12·3 내란 사건을 일으킨 주모자들까지 역사의 현장에서 폭력과 탄압을 지휘했던 가해자 대다수는 단 한 마디의 진정성 있는 사과나 반성 없이 망각과 궤변, 정당화로 일관해 왔다. 책임을 회피하는 그들의 오만함 속에서, 피해자와 유족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아물지 않는 피고름이 흐른다.  


놀란의 <오딧세이>는 영웅을 신화 속에서 내려놓고, 자신이 저지른 약탈과 살인의 무게를 직시하게 만든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참된 귀향이란 단지 고향 땅을 다시 밟는 것이 아니라, 광기 속에 짓밟았던 희생자들에 대한 깊은 반성과 부끄러운 역사를 정면으로 직시하는 성찰을 통해 비로소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되찾아가는 고통스러운 여정이라는 점이다. 끝내 반성하지 않는 이 땅의 가해자들을 향해, 영화는 묵직하고 서늘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