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고려대 명예교수), 심규상(오마이뉴스 기자), 양해림(충남대 교수), 장원순(공주교대 교수), 좌세준(변호사)님이 돌아가며 

2주에 한 번씩 인권현안에 대해 기고를 하는 전문가 칼럼입니다.

"나의 할아버지는 죄인이 아닙니다" 조롱받는 역사를 위한 변론 75년의 침묵을 깬 청년의 고백, 이제 ‘법’이 응답할 차례

관리자
2026-04-15

글_심규상(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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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제주문예회관에서 '제주 4·3 80주년 공동 준비'를 선포하고, 전국적인 국가폭력 희생자 단체들

(제주 4·3 유족회, 여순10.19항쟁유족회 , 대전 산내 골령골, 5·18 민중항쟁)이 '과거사 해결을 위한 공동 선언'을 다딤하고 있다. ⓒ 심규상

 

"할아버지가 잡혀가 물고문을 받은 적은 있지만, 그 외엔 별다른 피해가 없었습니다."


지난 2일, 제주시청 앞 '4·3 특별법 개정 촉구 유족·시민 결의대회' 발언대에 시민대표로 선 청년 양희주 씨의 담담한 고백에 청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수만 명의 목숨이 사라진 비극의 땅에서, '고문' 정도는 사소한 일로 치부됐던 제주 사람들의 비극이 그 문장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몇 년 전에서야 평생 침묵했던 외할아버지가 과거 목포 형무소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수형인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외할아버지도, 부모도 연좌제의 굴레를 피하기 위해 팔 남매 자식들에게조차 철저히 과거를 숨겼던 겁니다.

이 청년은 이날 "할아버지가 '숨겨야 할 죄인'이 아닌, 늦었지만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명예를 회복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우면서도, 그 오랜 세월 말 한마디 못 했던 삶이 너무도 아프다"고 토로했습니다.

내후년이면 제주에서 4·3 항쟁이 일어난 지 80주년이 됩니다. 하지만 4·3 추념일 때마다 행사장 주변에서 제주의 비극을 주도했던 '서북청년단' 이름을 그대로 내걸고 극우 세력의 집회가 열립니다. 단순한 정치적 의사 표현이 아닙니다. '4·3은 폭동'이라 외치며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습니다. 피켓 대신 스마트폰을 들고 중계합니다.

이들이 휘두르는 무기는 '표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타인의 존엄을 파괴하고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며 이득을 취하는 행위까지 자유의 영역으로 보호할 순 없습니다. 이미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홀로코스트 부정을 형사 처벌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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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제주시청 앞에서 열린 '4·3 특별법 개정 촉구 유족·시민 결의대회' 에서 참석자들이 4.3왜곡처벌법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 심규상

 

올해 4·3 추념식에서는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4·3 왜곡 처벌법'을 제정해 달라는 요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4·3 왜곡 처벌법'은 특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폭력에 의해 평생을 숨죽여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국가가 제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입니다. 75년 만에 겨우 할아버지의 무죄를 받아낸 청년에게, 다시금 "당신 할아버지는 폭도였다"는 조롱을 듣게 하는 사회는 정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반복되는 역사 왜곡의 위기 속에서 전국의 국가폭력 관련 유족들이 제주에서 만났습니다. 제주 4·3 유족회를 비롯해 여순 10·19, 대전 산내 골령골, 5·18 민중항쟁 단체들은 제주문예회관에서 ‘제주 4·3 80주년 공동 준비’를 선포하며 연대를 공식화했습니다. 제주의 비명과 여수의 통곡, 대전의 넋이 하나로 모여 한국 현대사의 정당한 줄기를 세우겠다는 다짐입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너무 오래도록 각자의 섬에 갇혀 서로의 울음소리를 파도 소리로 오해하며 살아왔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4·3 왜곡 처벌법'이 제주만을 위한 것이 아닌, 조롱받은 모든 국가폭력 희생자와 유족들이 받은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번 공동 선언은 4·3 80주년을 2년 앞둔 시점에서 국가폭력 피해자 단체들이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입법 공조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지 표명이기도 합니다. 개별 사건의 해결을 넘어선 전국적인 연대 틀 안에서 ‘정의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는 선언입니다.

4·3 특별법 개정을 통한 왜곡 처벌 규정 마련부터 여순 사건의 진실 규명,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까지, 이들이 내딛는 공동의 발걸음은 이제 정치권의 실질적인 답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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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3년. 4.3 추념식이 열린 제주 4.3 평화공원 앞에서 서북청년단이 탄 승합차가 나타나자 4.3 유족들이 저지에 나섰다. 이에 경찰이 승합차를 둘러싸고 막고 있다.

ⓒ 심규상


이제는 ‘법’의 시간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4·3에 대한 왜곡과 폄훼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국회도 제도적 뒷받침을 강조했습니다. 정부와 정치권의 약속은 이제 허공을 맴도는 수사가 아니라 '법전'에 새겨진 문장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를 조롱하는 혐오 세력이 활보하는 사회에서 ‘화해와 상생’은 요원합니다. 전국의 유족들이 각자의 슬픔을 넘어 평화와 인권의 가치로 결속한 만큼, 국회와 정부는 이들의 절실한 목소리에 ‘완전한 해결’을 위한 법과 제도로 응답해야 합니다.

할아버지의 과거를 숨기고, ‘죄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또다시 수십 년을 기다리게 하는 일은 제주에서도, 여순에서도, 광주에서도, 대전 골령골에서도 더는 없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