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왈리의 시선>> 내 안에 있던 유령의 시간(임애솔)

2026-07-28

글_임애솔(대전충남인권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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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처음 화면에서 마주한 표지는 묵직했고, 조금은 지루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평소보다 천천히 문장을 따라갈수록 어느새 작품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이섭뿐 아니라 스쳐 가는 인물들의 삶까지 또렷하게 다가왔고, 소설이란 타인의 자리에 잠시 서보게 하는 것임을 느꼈다.

타인이란 시선

이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남북 분단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 그의 삶을 따라가며 국가와 이념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국가와 이념은 개인을 보호하기보다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억압했으며, 이섭은 남과 북 어디에도 평생 온전히 속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전쟁이 끝났지만 가족과의 단절, 감시와 연좌제, 이루어질 수 없는 기다림 속에는 전쟁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물리적으로 헤어진 가족은 그의 마음속에서 계속 살아 있었고, 그리움은 죄책감이 되어 평생 또 다른 존재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의 ‘유령’은 만나지 못하는 가족의 기억이자, 어디에도 머물지 못한 이섭 자신이라고 느꼈다. 그는 살아서도 유령의 시간을 살았고,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은 분단의 시간 속에 남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섭을 불쌍한 희생자로만 바라볼 수는 없었다. 그는 분명 국가와 역사의 피해자였고, 북쪽의 가족을 평생 그리워한 것도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감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 속에 머무르며 현재의 아내와 자녀에게 해야 할 책임을 충분히 다하지 않은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진심이라도, 돌봄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 반쪽짜리 사랑에 머물 것이다. 이섭의 아픔은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현재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일까지 정당화하지 못할 것이다.

두 사람, 두 삶

이섭이라는 한 인간을 알아가는 동안 이따금 내 아버지가 떠올랐다. 이섭과 아버지는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두 사람 모두 마음속에 무기력함과 외로움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마음이 한없이 무기력한 순간에도 가장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성실하게 행동하고 책임을 감당했던 분이다.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가족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내려놓기도 했다. 

반면 이섭은 자신의 죄책감과 그리움 뒤로 물러나 현재의 삶을 방임했고, 어떤 면에서는 버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가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나에게는 무기력하더라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했고, 적어도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기준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을 끝까지 읽으며 내가 가진 기준 역시 나의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제한된 잣대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힘들어도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다해야만 안전하다고 느꼈고, 무너진다는 것은 곧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변명하거나 회피하는 모습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섭을 향한 강한 거부감 안에는 그의 잘못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내가 평생 경계해온 삶의 모습에 대한 두려움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섭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잘못만으로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것 역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공감의 언어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장면은 영석의 아버지상을 치르던 날, 영석의 어머니가 무너져 울던 대목이다. 처음에는 충혈된 눈으로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 갑자기 통곡하기 시작한다. 이섭에게 안겨 더욱 크고 서럽게 울다가, 그의 팔을 베고 지쳐 잠든다.

“창자의 내벽에 굵은소금을 박박 문질러대는 것도 같고 칼로 자근자근 저미는 것도 같은 통증이었다.”

이 문장에서 나는 한동안 멈춰 있었다. 그 울음은 남편 한 사람의 죽음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고생스럽게 살아온 서순희 자신의 인생과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울지 못했던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애도하는 울음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어린 시절 슬픈 노래를 일부러 찾아 들으며 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내 감정을 받아주거나 나와 함께 슬퍼해 줄 사람이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슬픈 노래가 나 대신 울어주고, 나 대신 슬퍼해 주는 것 같았다. 눈이 붓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고 나면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마음속에 갇혀 있던 감정이 조금이나마 밖으로 빠져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영석 어머니의 울음을 묘사한 문장도 비슷했다. 아무도 대신 설명해 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슬픔에 언어를 붙여주고, 그때의 나를 뒤늦게 인정해 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위로라기보다는 깊은 공감에 가까웠다.

이런 게 문학이 하는 일인 걸까. 문학은 나조차 몰랐던 내 마음을 대신 말해주고,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에 언어를 준다. 그리고 독자가 그 감정 곁에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해준다. 영석 어머니의 고통을 읽으며 나는 삶과 죽음, 상실의 크기를 다른 사람이 함부로 잴 수 없다고 느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감정을 완전히 알게 되는 일이 아니라, 적어도 쉽게 판단하지 않고 그의 고통 곁에 잠시 머무르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내 유령의 시간

이섭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 ‘유령의 시간’은 이섭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가족의 경제적 상황과 어른들의 사정을 너무 일찍 알았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 도와주거나 보호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꺼내 보였을 때 그것을 받아주는 어른도 없었다. 결국 슬프고 불안한 감정, 돌봄받고 싶었던 어린아이의 마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은 내 안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너무 많은 것을 알면서도 정작 내 마음은 모르는 척했던 시간, 그것이 내 안에 있던 유령의 시간이었다.

지금도 때때로 일을 잘해내는 역할 뒤에 감정을 숨기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 그런 시간은 나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외롭게 한다. 이섭은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침묵했고, 나는 누구도 나를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침묵했다. 두 침묵의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자신의 일부를 드러내지 못한 채 살아갔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었다. 

유령의 시간은 과거의 특정한 시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못하는 시간, 역할만 남긴 채 자기 모습을 감추는 시간,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시간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존재한다. 

유예의 시선

이섭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내 안에서 오랫동안 이름 붙이지 못했던 시간까지 돌아볼 수 있었다. 사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개인이 살아온 역사와 배경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편견을 살피고 판단을 잠시 미루는 태도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나는 더 많은 사실을 아는 데만 머무르지 않는 공부를 하려 한다.

한 인간의 고통과 책임을 함께 바라보며, 타인의 슬픔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