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구자현(회원)

저는 영화 "타짜"(2006, 최동훈)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구렁텅이에 떨어진 주인공이 재야의 은둔고수 스승을 만나 절차탁마하여 성공한 후에 외나무다리에서 스승의 원수이자 최고수를 만나 끝내 스승의 복수를 해낸다는 무협지적인 플롯 이면에, 90년대 초중반 특유의 세기말 분위기에서 열정과 쾌락의 끝까지 몸을 담갔다가 끝내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주인공 '고니'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매력적인 영화지요. 고니는 '아귀'와의 마지막 한 판 승부를 앞두고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채, 여자친구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그 때는 너와의 의리를 지키겠다는 음성 메시지를 남깁니다.
여기 시대의 풍파를 두 번이나 온 몸으로 받아내며 한평생을 의리로 함께 한 커플이 있습니다. 이들은 법적으로 완벽한 부부이면서도, 두 달 가까운 피난선 생활에서 커플들에게 주어지는 호의인 은밀한 공간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다른 남자 얘기만 합니다. 긴 결혼생활동안 각자 한 번씩은 외도를 하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들은 진짜 사랑했었다는걸 느끼게 됩니다. 어떤 관계인 걸까요?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 "바다의 긴 꽃잎"입니다.
소설은 20세기 초중반 이념대립의 최전선이었던 스페인 내전 한복판에서 시작합니다. 당시 스페인은 공산주의·사회주의·아나키즘의 불안한 동맹으로 이루어진 공화파 정권을, 왕당파와 보수 가톨릭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군부가 전복시키려는 시도 아래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같은 편인줄 알았던 이들끼리 분열하여 총구를 겨누기도 하고, 민간인 학살과 같은 잔학한 전쟁범죄가 진영과 무관하게 벌어지는 모습은 "카탈로니아 찬가"(조지 오웰, 1938)에서도 잘 묘사됩니다. 주인공 '빅토르 달마우'는 의대생으로 의료 지원 업무를 맡아 전장에 있으면서, 시체와 부상병 사이에서 그리고 인간성 상실의 장에서 점점 스스로를 잃어갑니다.
또 다른 주인공 '로세르 브루게라'는 강인한 사람입니다. 빅토르의 동생 '기욤'과 사랑에 빠지지만, 기욤은 아들 '마르셀'이 잉태된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전장에서 산화합니다. 그러나 로세르는 강인합니다. 만삭의 몸으로 피레네 산맥을 넘기도 하고, 모래사장에 철조망 친 수준의 난민수용소에서도 버텨냅니다. 자신을 책임지려 하는 빅토르에게 내 한 몸 내가 챙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실제로 머나먼 타지에서 가게를 꾸리고 피아노 연주 알바를 하며 가계를 실질적으로 책임지던 것도 로세르입니다.
이들은 지구 반대편 칠레로 가는 피난선에 오르기 위해 위장결혼했습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작한 타지생활 및 결혼생활이지만, 칠레는 그야말로 환대의 땅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칠레는 사정이 좋지 못했습니다. 구리산업 대미수출 의존도가 높아 대공황 충격을 전면에 받아야 했고, 국토 전체가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해 지진도 상당히 자주 일어납니다. 동시기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념대립이 극한에 치달았기 때문에 국가가 누굴 도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는 전쟁 피해자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오늘은 나를 위해, 내일은 너를 위해." (181쪽)
그렇게 칠레인으로 받아들여져 2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들의 생활은 자리를 잡습니다. 스페인에서의 상처가 아물어갑니다. 심지어 1970년에 이르러서는 철저하게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정권이 집권합니다. "빅토르와 로세르와 마르셀은 군중과 뒤섞여 깃발을 흔들며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고 노래합니다."(318쪽) 혁명의 과격함도 자유주의의 방임도 아닌, 민중을 위한 새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안식은 길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사회주의·급진주의의 불안한 동맹으로 이루어진 사회주의 정권을, 보수파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군부가 전복시켰습니다. 스페인에서 겪었던 것과 동일합니다. 젊을 적 난민 수용소에 갔듯 이제는 정치범 수용소에 갑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개인은 너무 무력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삶은 계속됩니다. 이들은 어떻게 버텨냈을까요?
저는 이들의 삶에서 사랑을 봤습니다. 이들이 시대의 풍파를 두 차례나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읽으며 이들과 함께 겪는 50년의 세월에서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사랑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영화 "타짜"의 원작 만화책 배경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의 한국입니다. 30년대의 스페인이나 70년대 칠레 못지 않은 급변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엄혹하던 시대입니다. 1930년 말에 태어나 그 시절을 살던 한국 남자가 말하는 "의리"는 사실 사랑이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의리를 지키는 관계라고 소개했던 이 둘도 실은 서로에 대한 강한 사랑으로 한평생을 함께 했습니다. "사랑은 모든것을 이긴다(Love wins all)."(아이유, 2024) 소설의 마지막에서 빅토르는 말합니다:
"내 삶은 항해의 연속이었어. 나는 이 땅 저 땅을 돌아다녔지. 깊은 뿌리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이방인이었어. [..] 거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통제를 완벽하게 비껴간단다. [..] 젊은 시절에는 스페인 내전이, 나중에는 군사 쿠데타, 정치범 수용소, 망명으로 깊은 흔적이 남았더구나. 어느 것도 내가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저 나한테 들이닥친 거지.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은 내게 큰 만족을 안겨 주었지. 내가 가장 고마워하는게 뭔지 아니? 사랑이다. 그게 어느 것보다 내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나는 로세르를 만나 엄청난 행운을 누렸어."(460쪽)
덧붙임: 노래의 위대함을 말하고자 합니다.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는 실제로 칠레뿐 아니라 당시 남미 전역에서 불려지던 구호였다고 합니다. 이 구호는 칠레에서 좋은 작곡가들을 만나 1973년 6월에 노래가 되었고, 그 해 칠레에서는 '선거로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인해 명을 달리했습니다. 그만 불려져야 할 이 노래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칠레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불리는 노래가 됩니다. 저는 이 라틴 리듬과 단조 멜로디에서, 그리고 패배하지 않는다고 외쳐야 했던 곳곳의 수많은 역사에서, 한 두 마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영상
youtube.com/watch?v=Y3sw6yJ5WRs&feature=youtu.be
글_구자현(회원)
저는 영화 "타짜"(2006, 최동훈)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구렁텅이에 떨어진 주인공이 재야의 은둔고수 스승을 만나 절차탁마하여 성공한 후에 외나무다리에서 스승의 원수이자 최고수를 만나 끝내 스승의 복수를 해낸다는 무협지적인 플롯 이면에, 90년대 초중반 특유의 세기말 분위기에서 열정과 쾌락의 끝까지 몸을 담갔다가 끝내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주인공 '고니'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매력적인 영화지요. 고니는 '아귀'와의 마지막 한 판 승부를 앞두고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채, 여자친구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그 때는 너와의 의리를 지키겠다는 음성 메시지를 남깁니다.
여기 시대의 풍파를 두 번이나 온 몸으로 받아내며 한평생을 의리로 함께 한 커플이 있습니다. 이들은 법적으로 완벽한 부부이면서도, 두 달 가까운 피난선 생활에서 커플들에게 주어지는 호의인 은밀한 공간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다른 남자 얘기만 합니다. 긴 결혼생활동안 각자 한 번씩은 외도를 하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들은 진짜 사랑했었다는걸 느끼게 됩니다. 어떤 관계인 걸까요?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 "바다의 긴 꽃잎"입니다.
소설은 20세기 초중반 이념대립의 최전선이었던 스페인 내전 한복판에서 시작합니다. 당시 스페인은 공산주의·사회주의·아나키즘의 불안한 동맹으로 이루어진 공화파 정권을, 왕당파와 보수 가톨릭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군부가 전복시키려는 시도 아래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같은 편인줄 알았던 이들끼리 분열하여 총구를 겨누기도 하고, 민간인 학살과 같은 잔학한 전쟁범죄가 진영과 무관하게 벌어지는 모습은 "카탈로니아 찬가"(조지 오웰, 1938)에서도 잘 묘사됩니다. 주인공 '빅토르 달마우'는 의대생으로 의료 지원 업무를 맡아 전장에 있으면서, 시체와 부상병 사이에서 그리고 인간성 상실의 장에서 점점 스스로를 잃어갑니다.
또 다른 주인공 '로세르 브루게라'는 강인한 사람입니다. 빅토르의 동생 '기욤'과 사랑에 빠지지만, 기욤은 아들 '마르셀'이 잉태된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전장에서 산화합니다. 그러나 로세르는 강인합니다. 만삭의 몸으로 피레네 산맥을 넘기도 하고, 모래사장에 철조망 친 수준의 난민수용소에서도 버텨냅니다. 자신을 책임지려 하는 빅토르에게 내 한 몸 내가 챙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실제로 머나먼 타지에서 가게를 꾸리고 피아노 연주 알바를 하며 가계를 실질적으로 책임지던 것도 로세르입니다.
이들은 지구 반대편 칠레로 가는 피난선에 오르기 위해 위장결혼했습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작한 타지생활 및 결혼생활이지만, 칠레는 그야말로 환대의 땅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칠레는 사정이 좋지 못했습니다. 구리산업 대미수출 의존도가 높아 대공황 충격을 전면에 받아야 했고, 국토 전체가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해 지진도 상당히 자주 일어납니다. 동시기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념대립이 극한에 치달았기 때문에 국가가 누굴 도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는 전쟁 피해자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오늘은 나를 위해, 내일은 너를 위해." (181쪽)
그렇게 칠레인으로 받아들여져 2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들의 생활은 자리를 잡습니다. 스페인에서의 상처가 아물어갑니다. 심지어 1970년에 이르러서는 철저하게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정권이 집권합니다. "빅토르와 로세르와 마르셀은 군중과 뒤섞여 깃발을 흔들며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고 노래합니다."(318쪽) 혁명의 과격함도 자유주의의 방임도 아닌, 민중을 위한 새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안식은 길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사회주의·급진주의의 불안한 동맹으로 이루어진 사회주의 정권을, 보수파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군부가 전복시켰습니다. 스페인에서 겪었던 것과 동일합니다. 젊을 적 난민 수용소에 갔듯 이제는 정치범 수용소에 갑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개인은 너무 무력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삶은 계속됩니다. 이들은 어떻게 버텨냈을까요?
저는 이들의 삶에서 사랑을 봤습니다. 이들이 시대의 풍파를 두 차례나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읽으며 이들과 함께 겪는 50년의 세월에서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사랑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영화 "타짜"의 원작 만화책 배경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의 한국입니다. 30년대의 스페인이나 70년대 칠레 못지 않은 급변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엄혹하던 시대입니다. 1930년 말에 태어나 그 시절을 살던 한국 남자가 말하는 "의리"는 사실 사랑이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의리를 지키는 관계라고 소개했던 이 둘도 실은 서로에 대한 강한 사랑으로 한평생을 함께 했습니다. "사랑은 모든것을 이긴다(Love wins all)."(아이유, 2024) 소설의 마지막에서 빅토르는 말합니다:
"내 삶은 항해의 연속이었어. 나는 이 땅 저 땅을 돌아다녔지. 깊은 뿌리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이방인이었어. [..] 거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통제를 완벽하게 비껴간단다. [..] 젊은 시절에는 스페인 내전이, 나중에는 군사 쿠데타, 정치범 수용소, 망명으로 깊은 흔적이 남았더구나. 어느 것도 내가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저 나한테 들이닥친 거지.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은 내게 큰 만족을 안겨 주었지. 내가 가장 고마워하는게 뭔지 아니? 사랑이다. 그게 어느 것보다 내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나는 로세르를 만나 엄청난 행운을 누렸어."(460쪽)
덧붙임: 노래의 위대함을 말하고자 합니다.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는 실제로 칠레뿐 아니라 당시 남미 전역에서 불려지던 구호였다고 합니다. 이 구호는 칠레에서 좋은 작곡가들을 만나 1973년 6월에 노래가 되었고, 그 해 칠레에서는 '선거로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인해 명을 달리했습니다. 그만 불려져야 할 이 노래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칠레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불리는 노래가 됩니다. 저는 이 라틴 리듬과 단조 멜로디에서, 그리고 패배하지 않는다고 외쳐야 했던 곳곳의 수많은 역사에서, 한 두 마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영상
youtube.com/watch?v=Y3sw6yJ5WRs&feature=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