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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고려대 교수), 심규상(오마이뉴스 기자), 양해림(충남대 교수), 장원순(공주교대 교수), 좌세준(변호사)님이 돌아가며 2주에 한 번씩 인권현안에 대해 기고를 하는 전문가 칼럼입니다.

‘지적 인종주의’를 넘어 자유인으로 사는 길

작성자대전충남인권연대 작성일22-06-15 09:59  |  173 읽음

글_강수돌(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헌법 11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또, “사회적 특수계급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그리고 헌법 31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 두 조항만 보면 대한민국 국민은 ‘평등한’ 나라에서 사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보시라. 특히 31조의 “능력에 따라”란 말이 눈길을 잡는다. 이게 무슨 말인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란 말은 되레 ‘능력별로 차등하게’로 읽힌다. 그렇다면 다시 헌법 11조로 가보자.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말은 은근히 ‘능력에 따른 차별’은 용인한다로 해석될 수 있다. 게다가 우리 현실을 보면 “사회적 특수계급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지만 사실상 SKY대 내지 서울대로 상징되는 “사회적 특수계급”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리고 바로 이로 인해 전국의 모든 학부모가 세계적 “교육열”에 고통당한다.


  차분히 보면 우리 현실은 이렇다. 아이가 공부를 잘 해서 SKY대 내지 서울대에 진학하면 졸업 뒤 노동시장에 나가서도 성공할 확률이 높다. 특히, “훌륭한” 선배들이 여기저기서 끌어주고 밀어준다. “줄”만 잘 서면 출세와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다. 그렇게 해서 기득권층이 되고 특권층이 되면 돈과 권력의 맛에 중독된다. 국민의 1% 내지 10%도 안 되는 이 기득권층은 그 자녀들 역시 기득권층에 들도록 편법, 탈법, 불법도 가리지 않는다. 그 아래 중간층도, 그 아래도 모두 따라한다. 요컨대, 대한민국 현실은 가파른 사다리 질서(경쟁) 위에서 부모의 지위격차가 자녀의 학력격차, 학벌격차를 부르고 이것이 소득격차, 재산격차, 관계격차, 문화격차를 낳는다. 물론, 이 객관적 격차보다 더 고통스런 것은 주관적 격차, 즉 시선 격차다. 누군가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 어느 대학 출신이요?”라는 질문을 하거나 받는 경우, 벌써 시선 격차가 느껴진다. 질문하는 이는 우월감에, 질문 받는 이는 열등감에 빠진다. 물론 질문 받는 이가 우연히 서울대 출신이라면 서로 우월감을 공유하겠지. 그러나 전 국민의 90% 이상은 늘 열등감에 시달린다. 심지어 SKY대 중에서도 고려대, 연세대 출신들조차 ‘수능 문제 몇 개만 더 맞혔더라면 나도 …’란 생각 때문에 심히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게다가 SKY대 안에서조차 정시 전형자와 수시 내지 농어촌 전형자 사이에 시선 격차가 있을 정도다.


  전남대 백승주 교수는 지방 국립대 재학 시절 이후 여러 차례 경험한 이 학력·학벌에 따른 차별 구조를 “지적 인종주의”라 한다. 원래 인종주의란 인종이나 민족, 피부색 등에 따라 차별하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출신 대학이 SKY냐 아니냐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곧 지적 인종주의다. 이제 대한민국 헌법 11조와 31조를 결합해 보면, 이들은 형식적 평등권 조항에도 불구하고 “지적 인종주의”라는 실질적 불평등을 용인하고 있다. 최근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한 논란 중, 교육부가 학력과 관련된 차별 금지 조항을 빼자고 주장했던 일(거센 반발로 번복했지만)은 차라리 일관성 있었다며 웃어 넘겨야 할까? 자본의 필요에 따른 노동력 양성이 아닌, 인간다운 사회를 위한 인격체 양성을 해야 할 교육부조차 SKY대 내지 서울대 중심의 “지적 인종주의”가 지배적인 게 아닐까?


  여태껏 헌법이 가진 자기모순을 지적했지만 그러나 이는 결코 헌법을 고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나아가 우리의 차별 의식이나 차별적 보상 구조를 고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물론,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운동이 들불처럼 번진다면 약간은 덜 차별적인 사회가 되겠지만 역시 차별과 위계, 격차와 불평등은 교묘히 재생산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근본 문제인가? 그것은 자본이다. 자본이 돈벌이를 하려면 차이와 격차, 차별과 불평등이 필요하다. 만일 모두 평등하게 산다면 경쟁도 별로 없을 것이고 동기부여도 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 모두가 평등하다면 임금 격차에서 오는 생산비 절감도 없을 것이고 강력한 노동운동을 피해 공장 이전을 할 대안의 공간도 사라질 것이다. 정규직, 비정규직을 불문, 노동자를 죽도록 일하게 만드는 것은 배고픔의 두려움, 해고의 두려움, 실업의 두려움, 낙인의 두려움, 차별의 두려움이 아니던가? 자본은 바로 이 두려움을 먹고산다. 이 모든 사태를 진지하게 통찰한다면 우리의 참된 대안은 ‘탈자본’이다.


  자본은 우리(인간 주체)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우리 안의 자본은 가슴 깊이 내면화한 경제성장 강박증(“자원이 없는 나라가 성장이나 수출 없이 어떻게 사나?”) 또는 세계적인 교육열(“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라에 필요한 인재가 돼야 한다.”) 같은 걸로 나타난다. 우리 안의 자본은 ‘본전 의식’에도 있다. “자식한테 투자해서 본전이나 건지겠나?” “어느 은행에 저금해야 이자를 많이 줄까?” 우리 안의 자본은 이미 우리를 자본가로 만들기도 한다. 은행 저축자는 물론, 주식 투자자나 비트코인 투자자, 부동산 투자자가 바로 그들이다. 우리 밖의 자본은 재벌, 기업, 상공인, 공장과 사무실, 기계설비만이 아니라 국가, 초국적기업, 세계금융자본, IMF, 세계은행, WTO 등 무수하다. 나아가 우리들 안팎에 공통으로 걸쳐 있는 자본은 노동, 상품, 화폐, 가치 등의 범주로 움직인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눈만 뜨면 어딘가에 고용되어 노동하고 돈 벌 생각을 한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동, 상품, 화폐 물신주의 사회를 어떻게 고칠지 고민하지는 않는다. 돈의 가치로 표현된 가치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인간다움의 가치, 생명의 가치는 갈수록 뒷전이다. 오히려 인간성이나 생태계조차 돈만 된다면 얼마든 훼손하고 팔아넘긴다. 인간성과 생명의 가치를 일깨워야 할 교육조차 아이들을 일 잘 하고 말 잘 듣는 2세대 노동력(인적 자원)으로 길러내는 걸 본연의 사명으로 착각한다. 그 노동력의 가치를 드높이는 게 명문학교의 할 일이라 맹신한다.


  이 모든 걸 정직하게 응시하고 그로부터 ‘거리 두기’를 시작하는 게 탈자본의 출발점이다. 돈벌이가 아니라 살림살이가 중요하다는 것, 돈벌이조차 살림살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 행복한 살림살이를 위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이런 게 모두 탈자본의 실천을 위한 기본 철학이다. 그 이상의 구체적인 실천들은 서로 모여 앉아 소통하고 의논하면서 함께 만들어 가면 된다. 각종 소모임이 그 작은 걸음이 될 수 있다. 그런 모임에 같이 앉은 구성원들끼리는 학력이나 외모 등 그 어떤 차별도 용인하지 않는다. 누구나 나름의 목소리와 나름의 진실을 갖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대체로 자본을 위해 봉사하기에, 탈자본은 탈권력이기도 하다. 누구든 탈자본의 지향성만 있다면 평등하게 참여하고 자신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서로의 힘이 모일수록 자본이나 권력에 대한 두려움, 배제와 차별에 대한 두려움은 쪼그라든다. 모두가 서서히 참된 자유인(自由人)이 되는 과정이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인권’ 신장을 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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