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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고려대 교수), 심규상(오마이뉴스 기자), 양해림(충남대 교수), 장원순(공주교대 교수), 좌세준(변호사)님이 돌아가며 2주에 한 번씩 인권현안에 대해 기고를 하는 전문가 칼럼입니다.

과연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인가?

작성자대전충남인권연대 작성일21-04-06 23:10  |  53 읽음

글_강수돌(전 고려대 교수, 세종환경운동연합 난개발방지특위 위원장)



  누가 언제부터 말했는지 정확히 알 순 없으나 흔히들 “선거(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한다. 왜 그런가? 여러 가지 근거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나온 핵심 근거를 세 가지만 들면 이렇다.


  첫째, 민주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1조도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한다. 따라서 민주 국가의 국민들은 나라의 주요 정책 결정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요컨대, 민주시민으로서의 국민들이 나라의 중요 결정에 참여하는 통로가 선거(투표)라는 것이다.


  둘째, 국가 단위의 규모가 너무 크기에 국민이 그 대리인을 선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대리인 선출 과정이 선거로 나타난다. 우리나라 역시 5천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나라로서, 모든 국민의 참여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민의를 반영하는 대리자를 선출해 국정을 담당할 사람을 뽑는 절차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선거이고 투표다.


  셋째, 선거(투표) 과정이야말로 선의의 경쟁을 통해 최선 내지 차선의 결과를 도출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다양한 국민의 요구와 소망을 담아내는 각종 정책이나 비전이 제시되고 또 그런 정책과 비전들이 선의의 경쟁을 벌여 어떤 후보나 정당이 최선의 결과를 낳을지 결정하게 된다. 국민의 다양성도 인정하면서, 그 위에서 선의의 경쟁과 토론이 진행되면서 타협과 절충을 통해 국민 통합까지 이뤄내는 것이다.


  물론 굳이 이런 근거를 대지 않더라도 선거(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말하자면, 선거 없이 민주주의 없고, 또 민주주의 없이 선거 없다. 하지만, 과연 이게 끝인가? 


  따지고 보면,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명제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굳이 명제화하면 “선거는 민주주의의 악”이란 주장이다. 왜 그런가? 그 근거 역시 세 가지만 보자.


  첫째, 선거(투표)는 다수결 원리에 따른다. 물론 구체적인 규칙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선거에서는 후보자 중 최다 득표자가 당선된다. 그러나 과연 최다 득표자가 국민의 민의를 대표하는 자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규칙일 뿐, 실제로 민의 대변성을 입증할 근거는 약하다. 특히, 오랫동안 특정 정당이 권력을 잡아온 상태라면 조직, 돈, 인맥 등 다양한 측면에서 유리한 조건을 지닌다. 그런 상황에서 최다 득표를 얻는 건 매우 쉽고, 이는 진정한 민의와 반드시 합치한다고 보기 어렵다. 이렇게 되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은 선거를 통해 자기의 권력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결과를 부른다.


  둘째, 민주주의에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 하지만, 과연 그 국민들이 뽑은 대리인들이 실제로 주인의 말을 들어 일을 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군수나 시장, 지자체 의원들, 한마디로 기득권층이 국민이 아닌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온갖 법을 만들고 정책을 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100 퍼센트 국민을 배신한다면 반란이나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이들 기득권 세력들은 국민을 위한 정책을 ‘부분적으로나마’ 펴는 시늉을 한다. 하지만 대체로는 자기들 이익을 챙기는 방식으로 일을 한다. 선거로 대리인을 뽑았는데, 그 대리인이 대다수 국민이 아닌, 자기 이익을 위해 일을 한다면 ‘사기’ 아닌가?


  셋째, 선거 과정에서 선의의 경쟁, 정책 경쟁, 다양성 수용, 국민 통합 등의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선거 과정을 보라.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거짓말 대잔치, 정책 경쟁이 아니라 퍼주기 경쟁 내지 각종 개발 공약 남발, 다양성 수용이 아니라 거대 정당 간 독과점 대결, 국민 통합이 아니라 국민 분열만 강화한다. 특히, 선량한 정책 토론이나 민주주의와 삶의 질을 고양하는 내용보다 거짓말과 상대방 헐뜯기 대잔치가 벌어진다. 한마디로 ‘개판’이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은 정치에 신물이 난다고 한다. ‘그 놈이 그 놈’이란 말이 예사로 나오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런 근거를 보면 “선거는 민주주의의 악”이란 말도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과연 선거에 대해 이렇게 흑백 논리로 선명하게 찬반을 구분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다. 둘 다 일리가 있지만, 둘 다 완벽한 논리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선거(투표) 제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크게 세 차원의 대응 방식이 있다. 서로 결이 다르지만 모두 경청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당장 벌어지는 선거와 투표에 참여는 하되, 민주주의가 선거나 투표로 모두 대변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차원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최선’을 선택하기 어렵다. 차선 내지 차악을 선택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씁쓸함이 자주 몰려온다. 그게 우리 현실이니 어쩔 것인가? 하지만 바로 그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평소에 노력해야 한다. 지역마다 좋은 책을 읽고 모임을 가지며 평소에 다양한 삶의 문제들에 대해 토론과 소통을 해나가야 한다. ‘대리인’을 뽑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말만 하고 다닐 일이 아니라, 어떤 자가 되더라도 기층 민중 자체가 민주 의식에 투철해져야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수준을 반영한다.   


  둘째로, 정당 차원의 변화다. 현재의 민주당과 국힘당 사이에서 그네타기 하듯 투표할 일이 아니라면, 정당 차원에서도 새로운 구조 변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따지고 보면, 양대 정당 외 정의당, 민중당, 녹색당, 노동당, 사회당 등 다양한 진보/민주 성향의 소수 정당들은 너무나 열악하다. 그러나 촛불혁명을 원하는 다수 국민들, 나아가 더 근본적인 변혁을 원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제대로 담아내려면, 확실한 적폐 청산과 더불어 (강력한 언론개혁 및 검찰개혁은 그 전제 조건이다) 전 방위적인 사회개혁(실은 혁명)을 이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민주당 의원 중 비민주적인 자들 절반은 도려내고 그 빈 자리에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 야당 의원들이나 활동가들을 절반 이상 영입하여, ‘민주혁신당’ 같은 제3의 정당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야 유권자들 역시 믿고 지지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갖게 된다. 


  셋째, 가장 어려운 문제로, 선거 자체가 갖는 한계를 정직하게 직시하는 차원이다. 즉, 현재 벌어지는 정당 대결 구도나 한심한 거짓말 대잔치 내지 개발 경쟁 따위를 제대로 넘어가려면 기존의 선거나 정치 자체에 대한 근본 비판이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정치 전망을 다시 만들어 내려면 기존의 모든 제도화된 “정치”와 확실히 단절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기존 정당이나 제도들과 결별을 하고 나아가 대리인 정치나 위임의 정치와 근본적 결별을 해야 한다. 진정 필요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직접행동들, 예를 들면 민생 현장 및 광장의 정치, 진보 유튜브(언론) 활동, 근본 비판을 하는 각종 토론의 장들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촛불광장에서의 민주 토론과 같은 것들을 자주 만들어 기존의 낡은 정치, 의회에 갇힌 정치를 완전히 바꿔내야 한다. 자본주의 화폐, 상품 관계에 갇힌 모든 구조를 바꿔내야 한다. 그래야 빚더미, (초)미세먼지, 코로나 사태, 자원고갈, 노동소외, 부정부패, 투기와 난개발, 사회경제 양극화 등을 모두 극복할 수 있다.


  보통선거 제도가 도입된 지 거의 140년이 흐른 오늘날 아직도 투표함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은 1888년에 옥타브 미르보의, “양들을 보라. 그들은 도살장으로 간다. 아무 말도 없고 아무 기대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죽일 도살자를 위해, 나아가 자신들을 맛있게 먹을 부르주아를 위해 투표하진 않는다.”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코앞의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중요하지만, 그것의 한계를 간과해선 안 된다. 이런 면에서 1906년엔 알베르 리베르타드는 더 심한 말도 했다. “유권자는 곧 범죄자다. […] 유권자, 당신은 현 상태를 수용하는 자다. 그렇게 선거 제도를 지지하는 바람에 결국 오늘의 이 모든 비참함을 미리 승인해준 거나 다름없다. 이런 식으로 유권자는 이 제도가 영원히 지키려는 노예 상태를 지지하고 만다.” 정말 통렬하다. 이 말이 이해가 안 되는 이들은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선거에서 거짓말쟁이나 투기꾼을 뽑아주는 유권자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범죄자 내지 공범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주당 인사들을 뽑는 경우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크게 보면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런 말이 일견 ‘불편’하다고 해서 결코 그 진의를 무시해선 안 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미르보나 리베르타드 같은 이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곱새기며 살아야 한다. 그것만이 ‘선거의 배신’, ‘투표의 배신’을 거듭 당하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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